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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리 (2014) 5월 책 너머 보고서입니다.
2014-05-27 12:10:45
평정평온 (jfoster) <> 조회수 840

I. 지난 모임

* 일시 : 2014년5월19일(월)9시50분~14시

* 책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2』(이덕일 저, 다산초당)

* 4 월의 시 : 안오일의 ‘왜?’

 

II. 차기 모임 안내

* 일시 : 2014년6월16일(월) 10시

* 책 : 『기생충 열전』(서민 저 , 을유문화사)

* 5월의 시 : 김수영의 ‘풀’

 

III.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2』를 읽고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시대가 만든 운명』(이덕일, 다산초당)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 이들이 꿈꾼 세상』을 읽고

 

* 서 희 정 *

 

궁금했던 조선시대를 짧은 부분이라도 알 수 있었다. 소설처럼 쉽게 풀어 쓴 역사서 라는 점이 이덕일 역사서의 미덕인 반면 저자의 감정이 많이 실려 역사에 문외한 인 나 같은 사람은 비판적으로 읽을 수 없어 아쉬웠다. 그 부분은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을 통해 내가 채워야 할 부분. 숙제가 싫지만은 않다. 역사맹인 나한테 싹을 틔워 줬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1권에서는 정조와 정약용의 일화가 많았는데 이토록 왕을 깊이 섬긴 신하와 이토록 신하를 아낀 왕이 있었을까 '군신유의' 아니 그 이상이었다.

신념과 능력을 두루 갖춘 사람들의 행적은 알아갈 수록 하나하나가 기쁨이었다.

관료로서 정약용의 모습에서 백성을 대하는 진심이 감동을 주었다. 이 시대의 관료들이 본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귀양지에서 조차 약용은 개인적 삶보다 시대의 아픔을 같이 했다.

그가 귀양지에서 쓴 애절양은 너무 아팠다. 그 시대 하층민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직선으로 다가와 느껴졌다.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 후 남인의 피바람은 정해진 수순 성리학 사회여서 천주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남인을 내치기 위한 수단으로 남인이 들여온 천주교를 명분 삼았다는 것은 신선했다. 정약종, 황사영의 죽음은 순교만으로 볼 수 없는 정치적 희생이라는 생각. 이 부분 역시 더 알아봐야 할 개인적 숙제다.

붕당에 대해 잘 모르니 조선 시대 보수 노론 벽파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기득권 유지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시대의 상류의 모습과 그들이 너무나 닮아 있었다.

 

*김 정 숙*

 

정약용이 살던 그 시대가 희망의 시기에서 처참하고 희망이 없는 시대로 추락하는 과정을 알수 있었다. 위대한 군주였던 정조의 처절한 싸움의 시간들을 수많은 인재가 받쳐주지 못해 그 또한 아픔이다. 외로운 정조와 정약용이 만들어낸 시간들은 노론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홀로 남은 정약용은 그 시대를 조용히 묻혀 지내야 했다. 핍박받는 백성들과 자신의 일가가 무너지는 걸 보며 다산은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다산은 진실이 왜곡되지 않기 위해 수많은 기록을 남겼던 것일까? 250년 전이 현재와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세월호 사고로 그 슬픔을 견뎌내야 하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조용히 생각해 본다.

 

*유순희*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용』23장-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고 미운 것을 밉다고 하며,

착한 것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시는 시가 아니다.”

- 정약용의 시론(詩論)에서-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을 읽고 이재규 감독 영화 ‘역린’」을 보면 책도 영화도 훨씬 이해가 빠르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은 정조가 즉위 당일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면서 꺼낸 말로 당시 집권당인 노론 세력을 떨게 만든 말이다. 영조는 사도세자 사후 정조를 일찍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켰지만 정조가 즉위하면서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포한 것이니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노론들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아무리 왕조국가에서 임금을 자의적으로 임금으로 여기지 않았던 노론이지만 사도세자 살해에 가담했고 정조의 즉위를 방해한 그들이 숙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노론 일각에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정조를 죽이거나 쫓아내려고 했다. 정조 즉위 초 있었던 ‘삼대모역사건’ 중 가장 큰 ‘정유역변(1777년7월28일)’을 다룬 이야기가 바로 ‘역린’이다. 영화에서 군권을 가지고 노론을 지탱하던 숙장 구선복을 치고 싶어 안달이 난 금위영 대장 홍국영에게 정조는 자신의 몫이라고 한다. 영화에는 구선복에게 기회를 준 정조가 등장하지만 정약용을 곁에 두기 위해 6년을 기다렸듯이 정조는 때를 기다린다. 재위10년(1786) 정순황후가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 이인을 역적으로 몰면서 공격하자 노론이 일제히 가세했는데 사건의 불똥이 구선복에게 튀면서 구선복이 사형당하고 노론의 군부세력이 상당 부분 몰락했다.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가벼운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마는,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들이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

『정조실록』(16년윤4월27일)

……

구선복도 국문에서 “저는 모년(某年)이후 용납 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항상 의구심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모년”은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년(영조38년)을 뜻했다. 그 자신이 사도세자 살해에 가담했다는 자백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구선복을 계속 등용하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재위 10년에야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1』(160~161쪽)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에 정약용이 정조를 만날 때까지의 시대적 상황을 설명하는 제1권을 읽고 보면 영화가 더욱 재밌다.

 이 책의 저자 이덕일은 사도세자의 훙서 직후 태어난 정약용(사도세자가 비운의 운명을 마친 24일 만인 임오년6월16일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남)과 세자를 살려달라고 애절하게 빌었던 세손 정조의 만남을 ‘시대가 만든 운명’이라고 평한다. 정조 7년(1783) 정약용은 세자책봉을 축하하기 위한 중광감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어 정조를 처음 알현한다. 성균관에 들어가 정조의 관심을 받으며 한 해도 반제에서 급제나 수석을 놓치지 않던 정약용은 만6년만인 정조13년(1789) 대과에서 장원을 해 벼슬길로 나선다. 하지만 남인을 우당으로 여기는 정조 곁에서 탁월한 논리와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나가는 정약용은 노론에겐 눈엣가시였다. 대부분의 친척들이 서학을 서교로 받아들인 정약용 집안에서 제아무리 서양학, 즉 서학을 단지 유학에 도에 보탬이 되는 학문(보유론)으로 봤다는 정약용의 주장에도 절대 유교 사회 조선에서 ‘천주교’는 노론에게 정약용을 없앨 최고의 빌미가 된다. 노론이 천주교를 이유로 정약용과 남인들을 공격할 때마다 정조는 “정학이 밝아지면 사학은 저절로 종식된다.”며 사상을 억압할 필요가 없음을 내세웠다. 정조15년(1791) 정약용의 외종 육촌인 윤지충과 그의 내외종 사촌 권상연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사건 즉, 진산사건이 발생하자 정약용은 서양 과학기술의 일종으로, 유학의 한 별파로 생각해 받아들였던 천주교를 완전히 버리게 된다. 또한 정조21년 정조가 정약용의 학문 수준을 높이 사 동부승지로 임명하자 만천하에 천주교 관계에 대한 진실을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정약용은 정조와 하늘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고백하는 일종의 양심선언인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천주교의 자취를 완전히 씻고 싶었던 정약용 하지만 정조는 재위24년( 1800) ‘남인 중용을 시사하는 연석 발언’을 하며 ‘대숙청’을 예고하고 6월28일 돌연 죽는다. 정조가 죽자마자 정순왕후를 필두로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재장악하고 정조 치세 24년을 부인하는 과거사 청산 작업에 들어간다. 남인 시파를 성리학을 부정하는 사교邪敎집단으로 몰아 숨통을 끊기 위한 근거가 필요했고 이에 다시 등장한 것이 천주교였다. 순조1년(1801)1월10일 대왕대비 정순황후는 사학邪學엄금 하교, 자교를 내리는데 이는 죄없는 사람을 무수히 죽음으로 몰고 간 인간도살 하교였다.

“닫힌 시대, 증오의 시대가 한 인간과 집안, 그리고 사회에 얼마나 큰 불행인지는 정약용과 그 형제들이 잘 보여준다. 우리 역사에서 정약용과 그 형제처럼 한 집안의 어깨에, 닫힌 시대의 무게가 온전히 지워진 경우는 없다. 그들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으나 단지 열린 사회를 지향했다는 이유로 저주를 받고 비참하게 죽어갔다. 정약용의 막내 형 약종은 신유박해(1801) 때 천주교 배교를 거부하다가 장남 철상과 함께 사형당했다. 약종의 셋째 부인 유씨와 둘째 아들 하상과 딸 정혜는 기해박해(1839) 때 사형당해 결국 온 식구가 절멸絶滅되었다.

……

정약용의 이복맏형 약현은 천주교도로 몰리지는 않았으나 그의 사위가 황사영인 탓에 시대의 격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황사영은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명으로 사지가 갈가리 찢겨죽었으며, 그의 부인 정명련과 아들은 관노가 되어 섬으로 유배 갔다. 국문鞠問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정약전과 약용은 유배지를 전전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12쪽)

 

“아집에 갇혀 변화를 거부했던 경직된 시대, 소아에 갇혀 개방을 거부했던 폐쇄의 시대, 반대 당파를 공격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서슴없이 죽이던 증오의 시대,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증오했던 불행한 시대의 유산을 한 몸에 안고 그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의 죽음은 단지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지향했던 정조시대 조선의 죽음이기도 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111쪽)

 

정조 사후 자신이 믿었던 피안의 세계와 목숨을 맞바꾼 셋째 형 정약종,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귀양지 흑산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며 지낸 둘째 형 정약전과 달리 정약용은 귀양지 강진에서 18년 동안 세상과 절연한 채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에게 학문이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절망적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고 ‘아픈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시종일관 세상과 동떨어지지 않았던 그의 학문세계는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슬퍼하고 그런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식인의 대안이 담겨 있었다.” 정약용은 귀향 후 왕성한 저술활동보다「묘지명」저술에 공을 들이는데 자신과 동료들의(천주교도가 아님에도 박해를 받은 사람들) 인생이 왜곡되어 전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먼 훗날의 평가를 위해서이다. 향년75세 조용히 하늘의 부름을 받은 정약용을 이덕일은 “다산은 인생에서는 실패하고 역사에서는 성공한 불행한 인물”이라고 평한다.

2권의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분노와 연민이다. 정약용의 인격적?학문적 위대함에 감탄하다가도 권력을 위해 또는 단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정치행태에 분노했다. 사람은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중에 깔깔 소리 내고 웃었던 유일한 장면이 2세 교육에 걱정이 많았던 정약용이 술에 관해 둘째 아들에게 보낸 편지 부분에서이다.

“너의 형이 왔을 때 시험 삼아 술을 마시게 했더니 한 잔盞에 취하지 않는구나. 물었더니 너는 형보다 배培라고 하는구나. 어찌 책은 아비의 버릇을 잇지 않고 술만 이 아비를 훨씬 넘어서는 거냐?

……

참으로 술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처럼 마시는 사람들은 입술과 혀를 적시기도 전에 직접 목구멍으로 넣는데 그래서야 무슨 맛이 있겠느냐? 술을 마시는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얼굴이 붉은 귀신처럼 되고 토악질을 하고 잠에 곯아떨어져 버린다면 무슨 정취가 있겠느냐.”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172~173쪽)

 

개혁군주, 학문군주 정조가 오랫동안 살았다면 우리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자신의 몰락보다 시대의 몰락을 더 슬퍼한 지식인 정약용이 자신이 완성한 학문, 다산학을 실제에 적용할 수 있었다면 세상은 지금과 달라졌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그들이 뜻을 펼치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무리가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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